“조선은 중국의 왼팔이자 울타리”…청 조선의 숨통을 바싹 틀어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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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4.16. 오후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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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04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장 먼저 드러낸 것은 일본이 아닌 청이었다. (…) 청의 직접 개입에 의해 조선의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됐지만, 강화도조약 때와 달리 10~30%의 관세 자주권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묘한’ 결과를 어찌 평가할지를 두고 조선의 의견은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 파국은 안타깝게도 일찍 찾아왔다.

2차 수신사로 1880년 8월 일본에 건너간 서른아홉의 김홍집은 하여장(허루장) 주일 청국공사로부터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선 친중국·결일본·연미국해야 한다는 조선책략을 받아들고 돌아온다. 한겨레 자료사진
1876년 2월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서 개항을 하게 된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가장 큰 문제는 ‘관세’였다. 근대 외교·통상 업무에 무지했던 조선은 강화도조약과 이후 맺어진 조-일 합의에서 무관세 무역을 받아들이며 ‘관세 자주권’을 포기하고 말았다. 조선 정부는 서민 생활에 직결되는 쌀·콩 등 미곡이 해외로 급속히 빠져 나가거나 값싼 서양 면포가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와도 적절히 개입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개항 초기 부산으로 몰려든 일본 상인들은 ‘무뢰배’가 많아 기만적 무역을 시도하기 일쑤였다. 일본은 불과 10여년 전 서구 열강에게 당한 대로 ‘후발주자’인 조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급속히 커져갔다.

조선 정부는 고심 끝에 1878년 9월 부산 두모진에 세관을 만들어 수출입 무역에 종사하는 ‘조선 상인’에게만 세금을 물리기로 했다. 수출품인 쇠가죽엔 15%, 수입품인 면화엔 25%의 세금을 매겼다. 그러자 교역량이 줄어 손해를 입게 된 일본 상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일본의 육전대(해병대)가 12월 두모진에 상륙했고, 군함 히에는 부산 앞바다에서 포 연습을 해댔다. 일본의 군사적 압박에 눌린 조선 정부는 12월26일 이 조처를 철회했다. 결국 관세 문제를 풀려면 일본과 교섭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 중차대한 임무를 떠안은 이는 당대 조선이 내놓을 수 있었던 최고의 에이스 관료이자, 구한말 역사를 회고할 때 김옥균 만큼이나 처연한 존재감을 남기게 되는 예조참의 김홍집(1842~1896)이었다. 서른아홉의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도쿄에 도착한 것은 1880년 8월11일이었다. 김홍집은 관세 문제 해결을 위해 교섭을 시도하지만, 일본은 ‘신임장’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김홍집은 크게 낙담했다.

위기에 빠진 김홍집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 것은 청이었다. 19세기 후반 살벌한 제국주의 질서 속에 내동댕이쳐진 조선에게 조-청 관계는 현재의 한-미 동맹이 갖는 의미만큼 절대적이었다. 김홍집은 8월20일부터 일본을 떠나는 9월7일까지 허루장(하여장) 주일 청국공사 등과 무려 6차례에 걸친 필담을 나눴다. 이 박진감 넘치는 대화 기록은 김홍집이 쓴 ‘수신사일기’ 속 ‘대청흠사필담’(윤현숙 옮김, 보고사)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전한다.

김홍집의 1차 관심사는 관세 문제 등 조-일 간 무역 현안의 해결이었다. 청은 이 기회를 활용해 ‘유일한 속방’으로 남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이를 활용해 큰 안보 위협으로 떠오른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외교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23일(음력 7월18일) 세번째 만남에서 김홍집이 하여장에게 말했다.

“통상에 관한 일의 이익과 해로움을 전혀 알지 못하니 참 답답합니다.”

“일본은 요즘 서양의 여러 나라와 조약의 개정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그 문서가 상세하고 공평합니다.”

“개정을 의논하는 조약 문서를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구해 보겠습니다만, 이 일은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합니다.”

하여장은 김홍집에게 일본 역시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일본이 만든 개정안을 참조해볼 것을 권했다. 김홍집이 “극진한 가르침을 듣고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냐”며 감격하자, 하여장은 화제를 돌려 뜻밖의 말을 꺼낸다. 조선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려면 청과 서양의 나라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세력균형론’이었다.

“근래 러시아 사람들이 귀국 북쪽 경계의 두만강 일대에서 경영하고 포치(布置·넓게 늘어놓음)한다는데 대관절 형편이 어떠합니까.”

“러시아 땅이 비록 경계에 닿았지만 지금까지 아직 통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서양 각국에는 균세(均勢·세력균형)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한 나라가 강국과 이웃하였는데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면 다른 나라와 연합하여 도장으로서 견제합니다.”

이 무렵 청은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 서부 ‘이리 지역’에서 발생한 러시아와 영토 갈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가 극동의 조선을 압박한다면, 만주와 접해 있는 수도 베이징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장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김홍집 때문에 몸이 달았는지 26일 만남에선 “제 생각엔 러시아의 일이 자못 급하다”면서 “현재 세계 각국 중에서 오직 미국이 백성의 주권을 높이는 나라이며 또 국가의 힘이 풍부하고 넉넉하다”고 말했다. 또 부하인 황준헌(황쭌셴)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외교 지침서인 ‘조선책략’을 쓰게 해 9월6일 전달했다. 황준헌은 이 글에서 조선이 “러시아의 병탄”을 막고 살아남으려면 친중국·결일본·연미국(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이어지고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여장 주일 청국공사는 청을 지켜내기 위해선 내정·외교를 직접 관리하는 등 조선을 속국화해야 한다는 강경한 대조선 정책을 주장했다. 이 방침은 1895년 청이 일본과 전쟁에서 패해 한반도에서 물러갈 때까지 이어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여장은 온화한 필답으로 김홍집에게 미국과 수교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는 병자호란(1636~1637) 이후 3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청의 대조선 정책이 극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심상찮은 변화였다. 청은 그동안 조선의 ‘내정·외교’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임 정책을 유지해왔지만,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로 ‘중화질서’가 무너져 내리자 노골적인 간섭 정책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김홍집과 필담을 나누기 불과 석달 전인 5월 초 총리아문에 보낸 보고서에서 하여장은 청이 취해야 할 대조선 정책으로 상·중·하 세 가지를 제시했다. 상책은 조선을 흡수해 청의 군현으로 만드는 것, 중책은 대신을 파견해 내정·외교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그게 안 된다면 하책으로 영국·미국·독일·프랑스 등과 통상하게 하며 조약문에 “대청국의 명을 받들어”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는 사실을 써 넣게 해 지배권을 인정받자는 것이었다. 이어 청일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청의 조선 외교의 근간이 되는 ‘주지조선외교의’(主持朝鮮外交議)라는 문서를 제출(11월18일 접수)한다. 이 문서에서 하여장은 조선은 중국의 안보에 핵심적인 “왼팔”이자 “울타리”이기 때문에 중국의 속국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조선을 대신해 외교를 주지하고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장 먼저 드러낸 것은 일본이 아닌 청이었다.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은 조선 내부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집권 여당인 고종과 명성왕후 등 민씨 척족들은 대외 개방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위정척사파의 극렬한 저항 때문에 이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의 조선책략은 이 교착을 뚫어낼 수 있는 명분이 됐다. 조선은 미국과 수교하겠다는 방침을 청에 전달하는 한편, 1881년 1월 개화 정책을 통괄하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다. 또 일본엔 신문물을 배워오기 위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청엔 무기 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한 영선사를 파견한다. ‘불통 군주’ 고종의 개혁적 이미지는 주로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이다.

보수 세력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경상도 유생 이만손 등은 1881년 3월 이른바 ‘영남만인소’를 통해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백해무익한 일을 굳이 해서 병란을 초래하여 오랑캐를 불러들이게 하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야당인 대원군 세력과 연합해 그해 10월엔 고종을 폐위하고 배다른 형인 이재선을 왕위에 추대한다는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다가 발각됐다.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워싱턴에 주미조선공사관을 개설할 형편이 못되자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민영익(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을 전권대신으로 한 조선의 보빙사는 1883년 7월16일 제물포를 출발해 두달 뒤인 9월18일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과 만났다. 앞줄 왼쪽부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미국인 퍼시벌 로웰,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 최경석, 유길준, 고영철, 변수.
고종은 개방을 향해 나아갔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교섭은 청의 강력한 입김 아래 1882년 3~4월 톈진에서 조-미가 아닌 청-미 사이에서 이뤄졌다. 조선은 텐진에 파견된 영선사 김윤식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데 머물렀다.

조약이 최종 조인된 것은 5월22일 제물포 화도진에서였다. 조선의 전권대표는 6년 전 강화도조약 때도 등장했던 신헌이었지만, 실제 총책임자는 2년 전 일본에서 낭패를 겪었던 김홍집이었다. 청의 직접 개입에 의해 조선의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됐지만, 강화도조약 때와 달리 10~30%의 관세 자주권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묘한’ 결과를 어찌 평가할지를 두고 조선의 의견은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김홍집·김윤식 등 실무 관료들은 ‘청의 개입을 수용하며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온건개화파)고 생각했다. 김옥균·박영효 등은 ‘청을 과감히 배제하고 자주를 추구해야 한다’(급진개화파)며 맞섰다. ‘개방 자체가 잘못’(위정척사파)이라는 의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갈등의 이면에 대원군과 민씨 일파 간의 살벌한 대립과 청·일 등 외세의 힘겨루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라를 거덜내는 큰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파국은 안타깝게도 일찍 찾아왔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두달 만인 7월 월급을 못 받은 구식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임오군란이었다. 조선 전체에 피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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