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부는 고심 끝에 1878년 9월 부산 두모진에 세관을 만들어 수출입 무역에 종사하는 ‘조선 상인’에게만 세금을 물리기로 했다. 수출품인 쇠가죽엔 15%, 수입품인 면화엔 25%의 세금을 매겼다. 그러자 교역량이 줄어 손해를 입게 된 일본 상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일본의 육전대(해병대)가 12월 두모진에 상륙했고, 군함 히에는 부산 앞바다에서 포 연습을 해댔다. 일본의 군사적 압박에 눌린 조선 정부는 12월26일 이 조처를 철회했다. 결국 관세 문제를 풀려면 일본과 교섭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 중차대한 임무를 떠안은 이는 당대 조선이 내놓을 수 있었던 최고의 에이스 관료이자, 구한말 역사를 회고할 때 김옥균 만큼이나 처연한 존재감을 남기게 되는 예조참의 김홍집(1842~1896)이었다. 서른아홉의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도쿄에 도착한 것은 1880년 8월11일이었다. 김홍집은 관세 문제 해결을 위해 교섭을 시도하지만, 일본은 ‘신임장’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김홍집은 크게 낙담했다.
위기에 빠진 김홍집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 것은 청이었다. 19세기 후반 살벌한 제국주의 질서 속에 내동댕이쳐진 조선에게 조-청 관계는 현재의 한-미 동맹이 갖는 의미만큼 절대적이었다. 김홍집은 8월20일부터 일본을 떠나는 9월7일까지 허루장(하여장) 주일 청국공사 등과 무려 6차례에 걸친 필담을 나눴다. 이 박진감 넘치는 대화 기록은 김홍집이 쓴 ‘수신사일기’ 속 ‘대청흠사필담’(윤현숙 옮김, 보고사)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전한다.
김홍집의 1차 관심사는 관세 문제 등 조-일 간 무역 현안의 해결이었다. 청은 이 기회를 활용해 ‘유일한 속방’으로 남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이를 활용해 큰 안보 위협으로 떠오른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외교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23일(음력 7월18일) 세번째 만남에서 김홍집이 하여장에게 말했다.
“통상에 관한 일의 이익과 해로움을 전혀 알지 못하니 참 답답합니다.”
“일본은 요즘 서양의 여러 나라와 조약의 개정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그 문서가 상세하고 공평합니다.”
“개정을 의논하는 조약 문서를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구해 보겠습니다만, 이 일은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합니다.”
하여장은 김홍집에게 일본 역시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일본이 만든 개정안을 참조해볼 것을 권했다. 김홍집이 “극진한 가르침을 듣고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냐”며 감격하자, 하여장은 화제를 돌려 뜻밖의 말을 꺼낸다. 조선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려면 청과 서양의 나라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세력균형론’이었다.
“근래 러시아 사람들이 귀국 북쪽 경계의 두만강 일대에서 경영하고 포치(布置·넓게 늘어놓음)한다는데 대관절 형편이 어떠합니까.”
“러시아 땅이 비록 경계에 닿았지만 지금까지 아직 통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서양 각국에는 균세(均勢·세력균형)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한 나라가 강국과 이웃하였는데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면 다른 나라와 연합하여 도장으로서 견제합니다.”
이 무렵 청은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 서부 ‘이리 지역’에서 발생한 러시아와 영토 갈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가 극동의 조선을 압박한다면, 만주와 접해 있는 수도 베이징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장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김홍집 때문에 몸이 달았는지 26일 만남에선 “제 생각엔 러시아의 일이 자못 급하다”면서 “현재 세계 각국 중에서 오직 미국이 백성의 주권을 높이는 나라이며 또 국가의 힘이 풍부하고 넉넉하다”고 말했다. 또 부하인 황준헌(황쭌셴)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외교 지침서인 ‘조선책략’을 쓰게 해 9월6일 전달했다. 황준헌은 이 글에서 조선이 “러시아의 병탄”을 막고 살아남으려면 친중국·결일본·연미국(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이어지고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은 조선 내부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집권 여당인 고종과 명성왕후 등 민씨 척족들은 대외 개방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위정척사파의 극렬한 저항 때문에 이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의 조선책략은 이 교착을 뚫어낼 수 있는 명분이 됐다. 조선은 미국과 수교하겠다는 방침을 청에 전달하는 한편, 1881년 1월 개화 정책을 통괄하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다. 또 일본엔 신문물을 배워오기 위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청엔 무기 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한 영선사를 파견한다. ‘불통 군주’ 고종의 개혁적 이미지는 주로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이다.
보수 세력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경상도 유생 이만손 등은 1881년 3월 이른바 ‘영남만인소’를 통해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백해무익한 일을 굳이 해서 병란을 초래하여 오랑캐를 불러들이게 하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야당인 대원군 세력과 연합해 그해 10월엔 고종을 폐위하고 배다른 형인 이재선을 왕위에 추대한다는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다가 발각됐다.
조약이 최종 조인된 것은 5월22일 제물포 화도진에서였다. 조선의 전권대표는 6년 전 강화도조약 때도 등장했던 신헌이었지만, 실제 총책임자는 2년 전 일본에서 낭패를 겪었던 김홍집이었다. 청의 직접 개입에 의해 조선의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됐지만, 강화도조약 때와 달리 10~30%의 관세 자주권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묘한’ 결과를 어찌 평가할지를 두고 조선의 의견은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김홍집·김윤식 등 실무 관료들은 ‘청의 개입을 수용하며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온건개화파)고 생각했다. 김옥균·박영효 등은 ‘청을 과감히 배제하고 자주를 추구해야 한다’(급진개화파)며 맞섰다. ‘개방 자체가 잘못’(위정척사파)이라는 의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갈등의 이면에 대원군과 민씨 일파 간의 살벌한 대립과 청·일 등 외세의 힘겨루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라를 거덜내는 큰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파국은 안타깝게도 일찍 찾아왔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두달 만인 7월 월급을 못 받은 구식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임오군란이었다. 조선 전체에 피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